입력 : 2014.12.19 09:00
[맛난 집 맛난 얘기]]
서울 대학로 <순대실록>
순대 집이나 순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그렇다! 왠지 조금은 낡고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도 조금 나줘야 할 것 같다. 심지어 불량식품으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서민적 느낌이 좋아 순대 집을 찾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젊은 층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칙칙한 이미지 때문에 순대와 사귀길 꺼린다. 서울 대학로 <순대실록>에 들어서면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의 실내가 기존 순대 집과는 판이하다. 점포 분위기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집은 순대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정 반대로 바꿔놓았다. 옥호처럼 순대의 역사를 새로 쓰려는 각오로 시작한 집이라는데…
순대 집 사장님은 순대 역사 연구가
<순대실록>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있다. ‘그냥 순대가 아닙니다 전통 슌대를 만듭니다’. 예사롭지 않은 문구다. ‘순대’와 ‘슌대’는 대체 뭐가 다른 것일까? 일단 ‘슌대’는 순대의 19세기 표기법에 따른 표기다. 얼마 전 1891년에 펴낸 ‘음식방문’이라는 조리서가 충남 홍성에서 발견됐다. 이 책에도 비슷한 표기가 많이 나온다. 슐(술), 숑슌(송순), 반쥭(반죽), 쇼쥬(소주), 슟불(숯불) 등이다. 그러니까 <순대실록>이 내건 이 구호는 순대의 원형이 살아있던 19세기 ‘슌대’의 전통을 잇겠다는 의지의 표시다. 어떻게?
<순대실록> 주인장 육경희 씨가 10년 된 순대 집이었던 이 점포를 인수한 것은 3~4년 쯤 전이다. 처음부터 순대를 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점포 모양이 예쁘고 탐났다. 첨단 문화와 젊음의 거리인 대학로에서 순대는 다소 이질적인 음식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저분한 내부를 직접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자, 대한민국 최고로 만든다면 순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역발상이었다.
이때부터 육씨와 직원들은 1년간 순대 연구에 몰입했다. 국내 으뜸이라는 순대 맛집들은 모조리 찾아다녔다. 순대에 관한 책이나 기록도 모두 꼼꼼히 뒤졌다. 단순히 맛있고 질 좋은 순대 개발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순대의 원형과 정체성, 순대의 변천사와 세계적 분포 등 순대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연구했다. 우리 순대의 원형을 밝히고 재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원형의 토대 위에서 순대의 새 전통을 야심차게 다져나가고자 했다.
분투했던 이들 앞에 ‘시의전서’라는 옛날 조리서가 나타났다. 역사상 ‘슌대(순대)’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책이다. 용어가 기록되지 않았을 뿐, 사실 순대는 훨씬 이전 시대부터 먹어왔을 것이다. 이들은 이 책을 텍스트로 삼고, ‘시의전서’에 기록된 조리법을 순대의 정통으로 보았다.
‘슌대’ 토대로 볶음과 스테이크 등 순대 재해석
다른 음식도 그렇지만 2세기 전의 순대를 그대로 재현해 지금 먹을 수는 없다. 요즘 사람의 입맛이 200년 전에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집에서 채택한 방법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순대의 근본은 시의전서에 두되 현대인의 입맛에 맞춘 순대를 재창조한 것이다.
숙주·미나리·무·두부·배추 등 시의전서에 기록된 소재를 기본 재료로 삼았다. 여기에 해바라기, 땅콩, 잣 등 견과류와 흑미, 수수, 녹두 등 곡류에 표고버섯, 당근 등 채소류를 더해 모두 20여 가지 재료를 소로 넣었다. 영양 균형과 맛을 두루 고려해 수차례 실험을 거친 뒤 최종 조리법을 정했다. 19세기 이전까지 먹어왔던 순대를 ‘시의전서’가 정리했다면, 21세기 이후에 먹을 순대는 <순대실록>이 만들어가겠다는 생각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전통 찹쌀슌대(반 접시-6000원, 작은 접시-1만2000원, 큰 접시-2만원)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났다. 선지순대 뿐 아니라, 선지순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선지를 빼고 계란과 채소를 보강한 야채순대(백순대)도 있다.
슌대철판볶음과 전통 찹살 슌대, 슌대국밥
<순대실록>의 가마솥은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마치 조선시대 사관들이 지근거리에서 24시간 임금의 언행을 꼼꼼히 기록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가마에서는 100% 순수 돼지 사골을 곤다. 이렇게 14시간을 끓인 육수가 이 집 순댓국의 국물이다. 이 국물로 만든 것이 슌대국밥(7000원, 특-9000원)이다.
<순대실록>은 앞으로 외국인들도 주저 않고 먹을 만한 새로운 순대들을 속속 선보일 것이라고 한다. 주인장 육경희 씨의 순대 연구는 내년쯤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대한민국 순대의 새로운 역사를 써보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순대실록>이다. 앞으로 나올 육씨의 저작물을 읽어보거나 이 집의 순대를 먹어보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 집 옥호에 왜 ‘실록’이란 단어가 들어갔는지를. 1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지금의 <순대실록>은 내년 1월에 바로 옆집으로 옮겨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나갈 예정이다.
서울 종로구 동숭길 125(2014년 1월, 동숭길 127 2층으로 이전 예정), 02-742-5338
기고= 글,사진 이정훈